2014. 2. 14. 08:44ㆍBook Story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권.
<p008>'"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이 저주받은 운명의 주인공
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혔으나, 그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이 지배
할 수 있는 공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이며, 현실이 응축된 미래라는 사실을 수없이
탐독했던 역사서 속에서 깨달았다. 현실이 과거에 지배받을 때 미래는 불행해짐을
그가 본 역사서들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런 과거를 가슴에 묻고 또 다른 길,
미래로 나아갔다. 그것은 굴복도 회피도 아니었다. 자신과 왕실, 그리고 조선의
저주받은 운명과 맞서 싸우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p011>'그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
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랬다.
1800년 6월 28일, 거의 죽음과 함께 조선은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오늘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시대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를 갈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갈구는 언제나 크지 않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꾸었던 꿈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과거 아닌 미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열려고 했던 그의 미래가 우리의 내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p017>'정조 시대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관찬 사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문집들과 외국의
기록들까지 망라해야 한다. 집권 세력이 감추고자 했던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보여 준다.'
<p053>'이렇게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그 소년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었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스물다섯의 나이였으나
그 25년 동안 그가 감내했던 고통과 사색과 번민의 무게는 동시대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p075>'홍인환과 정후겸은 이렇게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겉으로는 즉위 방해 사건을
단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데 대한 단죄였다. 정조는
사도세자란 말을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한 주모자들을 이렇게 처벌했다.
이로써 정조는 과거사 정리가 일단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p078>'예순여섯의 영조는 어의궁으로 향했다. 새로 신부를 맞이하는 친영례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 이을 한 소녀가 어의궁에서 영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간택 끝에 뽑힌 김한구의 딸로 불과 열다섯 살짜리 소녀였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렸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 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p095>'김귀주와 그 일당 정이환까지 제거함으로써 두 외척 제거라는 정조의 오랜 꿈은 즉위
반 년 만에 달성된 셈이었다. 영조 38년 사도세자를 살해한 후 극도로 비대해진 외척
세력이 이렇게 일단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시작에 불과했다. 조선의
외척은 한 번의 공격으로 발본색원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었다. 여전히 궁중 깊숙한
곳에 정순왕후와 혜경궁이라는 외척의 뿌리는 건재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다.'
<p125>'자객을 동원해 정조를 시해하려 하고, 주술로 저주해 죽이려 하고, 반정으로 내쫓은 후
은전군을 추대하려 한 이 세 사건을 3대 모역사건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 정조의 혈육인
은전군은 죽었으나 노련 세력인 홍낙임은 살았다. 군약신강의 나라 조선 왕실의
비극이었다.'
<p157>'홍국영의 죽음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제 비로소 정조는
홍국영의 구상이 아니라 세손 시절 수없이 꿈꾸었던 자신의 구상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정조 시대의 개막이었다.'
<p231>'선정의 후손이란 후광으로 화려하게 조정에 등장했던 송덕상은 불과 5년 만에 역적이란
공세 속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즉 노론 당인들에게 송덕상은 역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조의 신하가 아닌 송덕상의 신하일 뿐이었다.'
<p261>'이렇게 해서 정조는 하나 남은 이복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다. 군주이면서도 이복동생
한 명을 보호하기 위해 단식까지 해야 하는 것이 정조의 현실이었다. 언제라도 정순왕후의
명만 있으면 총궐기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노론 세력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정조는 노론 이외의 인물들을 키우는 것이 이런 정치 지현을 바꾸는 근본 대책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정조는 남인들을 주목했다. 남인들을 중용해 국정의 파트너로 찾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인들을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남인들은 다른 문제로
발목이 잡혀 있었다. 바로 천주교였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권.
<p013>'조선은 이제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 차원의
문제였다. 그 누구보다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을 많이 읽었던 정조는 성리학 유일사상
체계로는 조선이 더 이상 미래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p029>'천주교가 성행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문체에 있다는 정조의 논리는 이제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자신들의 가문 출신이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계속 적발된 노론에서는 더 이상 천주교 공격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문체반정이라는 새로운 정국 현안으로 천주교 문제는 얼핏 사라져 가는 듯 보였다.
문체반정을 주도한 정조의 의도는 그대로 관철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반전의
국면을 예비하고 있었으니,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p067>'정조가 금등지사를 꺼냄으로써 채제공의 상소로 시작된 파문은 비로소
끝이 났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끝일 수는 없었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선왕의 후회와 현왕의 눈물로 미봉한 것일 뿐이었다. 미봉은 언젠가는 뜯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때 어느 쪽이 세력을 잡고 있는가에 따라 피를 흘릴 쪽이 정해질
따름이었다. 대리청정하던 저군을 뒤주 속에 넣어 죽인 비극이, 그 비극 속에서
죽어 간 세자의 원혼이 계속해서 조정 안을 떠돌고 있었다.'
<p078>'정조에게 사도세자 묘의 천장 목적은 사도세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만
있지 않았다. 화산에 살던 백성들과 다른 곳의 백성들이 이주하여 건설할 새로운
도시도 장지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이 새로운 도시에 정조의 진정한
목적이 있는지도 몰랐다. 부친 묘 이장은 정조가 수 없이 그려 보았던 원대한 구상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원대한 구상이야말로 다시는 이 나라에 사도세자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근본방책이었다.'
<p080>'군사를 지휘하는 인물은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예문관 검열이었던 그는 영의정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등에게 '왜 세자를 구원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다가 전라도 해남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지금 다시 돌아와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으니,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구선복 일가가 장악했던
군권이 이제 사도세자의 충신에게 넘어온 셈이었다. 병조판서 윤숙의 지휘로 도열한
경기 감영과 수어청,어영청과 총융청 군사들은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바로 신하의 나라가 아닌 임금의 나라, 사대부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였다.'
<p082>'이제 사도세자가 누워 있는 이곳 수원은 더 나아가 조선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것이었다. 정조는 조선의 정치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사도세자의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재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을
새롭게 개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중심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 중심
지가 바로 이곳, 사도세자가 누워 있는 화산을 배후로 둔 수원성, 즉 화성이 될 것이
었다. 화성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도시, 정신과 물질이 모두 새로운 미래의
도시로 커 나갈 것이었다.'
<p089>'정조는 화성을 축조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 단 한 명의
백성도 강제 부역시키지 않겠다는 것과 국가 예산을 축내지 않겠다는 것 등이었다.
강제 부역도 안 시키고 국가 예산도 축내지 않는 방법은 왕실의 내탕금을 사용하는
것과 국가 예산 외에 다른 곳에서 예산을 만들어 내는 길밖에 없었다.'
<p101>'정조는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고도 거대한 성을 지을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까지 축성은 모두 소비적인 행정 행위였다. 그러나 정조는
축성이 소비가 아니라 생산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p107>'화성을 자급자족적인 도시로 만드는 것이 정조의 꿈이었다. 소비만 하는 도시가
아니라 생산도 하는 도시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수지와 대농장이 필요했다.'
<p114>'정조는 어떤 경우에도 백성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눈앞의 것만 바라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제왕은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했다. 정조는 또한 백성들이 눈앞의
것만 바라보는 것 같아도 '지극히 신명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p115>'조선에는 육의전으로 대표되는 시전이 있었다. 비단을 취급하는 입전, 무명을
취급하는 면포전, 명주를 취급하는 면주전, 베를 취급하는 포전, 모시를 취급하는 저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이 육의전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극심한 재정
부족에 빠졌던 조정은 관상인 시전에게 상업적 특권을 주는 조건으로 특별세를 받아
재정 위기를 넘기려 했다. 시전 상인들은 특별세를 납부하는 대신 평시서와 한성부의
상인 명부인 「전안」에 등록하고 특정 물품을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중에 '난전을 금지시킬 수 있는 권리'라는 뜻의 금난전권이 가장 큰 특권이었다.
금난전권은 서울 도성 안과 도성 아래 10리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전안」에 등록하지
않고 상행위를 하는 사상들을 금지시킬 수 있는 권리였다. 시전 상인들은 사상들의
상행위를 난전으로 규정하여 세금을 거두거나 소유 물품까지 압수했으며 이를 거부한
경우 형조나 한성부에 넘겨 처벌받게 했다. 처음에는 육의전에서 다루는 여섯 물품에
국한되었으나 나중에는 쌀과 소금, 생선에 이르는 모든 상품이 금난전권의 대상이었다.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무기로 물가를 마음대로 조절해 거부가 되어 갔고, 그 일부를
유력 벼슬아치들에게 뇌물로 바쳐 특권을 유지하는 정경유착 또한 성행했다. 조정에서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만든 금난전권은 차차 조선의 상업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었다.'
<p118>'이것이 조선 상업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신해통공이었다. 전통적인 육의전의
특권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나머지 잡다한 명목의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은 모두 폐지
되었고 이로써 일반 사상들은 서울 시내에서 상업 행위를 하고 백성들은 육의전 이외에
사상들에게서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다.'
<p124>'정조의 말대로 화성 성역은 10년의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채제공이 총괄하고
조심태가 현장에서 직접 성역을 지휘한 화성 성역에는 정조의 명으로 정약용이 고안한
기중기가 사용되는 등 조선의 모든 과학 지식이 총동원되었다.'
<p126>'정조는 조서 사회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회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농업생산력 발전에서 시작된 변화는 수공업과 상업으로 옮겨 가
사회 전체에 파급되었다. 정조는 화성이 사회의 이런 변화를 흡수할 뿐 아니라 선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화성은 행정도시이자 상업도시가 되어야
했고, 농업 발전을 선도하는 농업 시범도시가 되어야 했다. 조선이 나아가야 할 미래
계획도시가 되어야 했다.
화성은 정조 20년 낙성되었지만 진정한 준공은 재위 28년째인 갑자년(1804)이 될
것이었다. 갑자년은 세자가 15세 성년이 되는 해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칠순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정조는 이해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화성에서 평생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계획을 실천할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세자 추숭사업이자 정치개혁이었다. 화성은 바로
그런 의미가 담긴 도시였다.'
<p131>'느닷없는 무사들의 출현에 은언군은 크게 놀랐다. 혹시 자신을 죽이려는 정순
왕후와 노론의 흉계가 아닌가 의심했으나 곧 정조의 조치란 사실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눈물에 쏟아져 나왔다. 형제의 지극한 정에 절로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처럼 기구한 운명의 형제도 없었다. 부친은 뒤주 속에서 죽고 형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동생을 죽이라는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자신이 귀
양지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형의 부단한 투쟁의 결과였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살린 형이 도성으로 올라오라고 가마를 보낸 것이었다.'
<p136>'정순왕후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다. 은언군을 죽이기 위해 언문 전교를
내렸다가 되레 군권을 쥐고 있던 구선복 일가만 제거된 8년 전의 일이 아프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패배하지 않으리란 투지가 불타올랐다.'
<p138>'조선의 임금은 정조가 아니라 정순왕후였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 중 은언군이
정국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정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노론에서 임금으로 추대하는 경우뿐이었다. 노론
외에는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를
지지하는 소론과 남인이 은언군을 추대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은언군 문제는 정순왕후와
노론이 정조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정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정조보다 정순
왕후를 임금으로 받드는 노론의 속마음이었다.'
<p144>'내가 감히 스스로 성인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내 진실한 소망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만약 임시방편을 행할 적에 상도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권(편법)이
경(원칙)과 합치되는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강구해
온 것은 오로지 여기에 있다.'
<p160>'사도세자는 아들을 죽이는 것이 스스로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죽여 아들을 살렸다. 이 생각에 이르면 정조는 저절로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아파 올 수밖에 없었다.'
<p160>'드디어 정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혜경궁은 새삼 이 아들이 무서워
졌다. 왕위를 내던지려는 이유가 바로 사도세자 추숭 사업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생모
만 아니라면 자신은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했을 것이라 생각이 새삼 들었다. 외조부
홍봉한을 사형시키지 않은 것 자체가 자신에 대한 초인적인 효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가 말하는 것은 영조의 유훈 때문에 자신은 사도세자 추숭 사업을 할 수 없지만
세자가 국왕이 되면 대신 나설 수 있다는 논리였다. 영조로부터 사도세자의 일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3불유훈을 받은 것은 자신이지 그때 태어나지도
않은 세자가 아니었다. 세자가 국왕이 되어 할아버지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이
정조가 영조의 유훈을 어기지 않고 부친에게 효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178>'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
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p183>'세손 정조는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그에게 궁중은 자신을 죽이려는
정적들이 득실대는 위험한 곳이었다. 독서하며 밤을 새우는 것은 암살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대부분의 암살은 밤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즉위 후 정조는 반대 당파 신하들로 가득한 정국을 주도하는 방법의 하나로 학문을
선택했다. 신하들보다 월등한 학문 실력으로 정국을 이끌고 가려 했던 것이다.'
<p194>'정조는 새로 벼슬길에 나온 근신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근래에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공무를 보느라고
여가가 적기야 하겠지만 하루 한 편(篇)의 글도 읽지 못하겠는가? 바쁜 와중에
독서하려고 한다면 목표를 세워서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일 년이면 몇 질(帙)의 경적(經籍)을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몇 년간 쉬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간다면 칠서(七書)를 두루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독서할 날짜를
따로 얻고자 한다면 영영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명색이 선비라면서
경서(經書)를 송독(誦讀)하지 못한다면 어찌 선비다운 선비가 될 수 있겠는가?"
<p217>'정조의 옥사 판결은 살인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도 혹시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벽부터 시작된
일과는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졌다.'
<p248>'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
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
이었고, 연훈방을 정조에게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인의 친척이란 점에서 심환지는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p249>'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는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이는 상복을 입은 벼"
라며 슬퍼했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 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꾸었던 갑자년의
구상도 개혁의 꿈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p254>'이시수와 서용보를 승진시킨 것은 문제가 있는 인사였다. 약원 제조
였던 그들은 정조의 죽음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약원 제조들이 대거
승진한 바로 그날 사헌부에서 약원 제조와 어의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은 정순왕후의 인사가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p262>'정조가 그토록 살리려고 애썼던 동생 은언군 이인은 이미 5월29일
강화부에서 사사당한 뒤였다. 정순왕후 세력은 은언군을 죽이고 그 부인과
며느리까지 죽였다. 손자며느리와 증손며느리까지 죽이는 정순왕후를 보고
영조의 영혼은 가슴을 쳤을 것이다. 정조가 살려 주었던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도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은언군과 같은 날 사형 당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의 세월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정조가 1년에 한 번씩 은언군을
만나는 것을 지지했던 이주혁은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유배 갔는데, 그 역시
죽을 때까지 풀려나지 못했다.'
<p270>'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이 빈발하였다. 정조 재위 때는 민란이
없었다. 정조가 재위에 있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군부께 아뢰기만 하면 억울함을 풀어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 백성들은 임금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목숨 걸고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남에서, 북에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
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던 것이다.'
강한 여운이 휘몰아친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과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는 100쪽읽기당 당주님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역시 압록강. 책을 통한 광해군의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사는 경기충청의 노론과 영남의 남인 세력 간의 경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 두 책의 저자인 오향녕과 이덕일은 각각 반대파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이 비교가 된다는 것.
공통점이라면 권력을 잡기 위해. 또 유지하기 위해 벌어진 촌극이라는 사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그 1권은 인물에 집중되어 있었다. 영조에서 정조로
시대가 바뀌면서도 그 권력의 중심은 늘 노론에 있었다. 정조는 힘이 없었고,
우선 힘을 길러야 했다. 왕이라 하여 무조건 신하를 벌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인물들의 소개와 힘을 기르는 정조. 그리고 정조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정조는 낯선 왕이었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이산 또한 난 보지 못했기에. 내가 본 정조의 모습은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
나온 모습 뿐이었다. 극 중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백동수와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재편해서 나타냈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밖에서 죽은 후
뒤주로 옮겨졌다는 부분은 참신했다. 그리고 정조는 늘 암살의 위협에 처해 있었고
김광택과 백동수가 보호했다. 늘 늦은 시각까지 책을 봤던 정조의 모습이 드라마에서도
그려졌다.
그렇게 인물 중심. 정조의 정치력 중심의 1권은 사실 지루한 감이 많았다.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인물을 담기에 난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2권은 본격적으로 개혁군주 정조를 보여준다. 특히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수원을 개혁의 거점으로 삼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정조의 정치력과 개혁군주
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버지의 자식들. 지키지 못한 정조.
그리고 은언군을 보호하기 위한 정조의 눈물겨운 노력은 가슴이 아팠고,
습관이 되어버린 독서하는 정조의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
또한 정조의 백성들을 살피는 마음은 내게도 진하게 전해졌다.
작가와 여러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정조가 독살 됐을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정조실록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다. 이 책 또한 실록이 아닌 다른 다양한
사료들을 근거로 쓰여졌다.
역사에서 만약에? 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라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직후.
지금 나 또한 만약 정조가 계획했던 상왕으로서의 역할까지 할 수 있었다면...?
이런 생각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분명 정조는 광활한 독서량으로 인해 틀 속에
갇히지 않고 깨어있는 군주였다. 그렇기에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아쉬움이 더
진하게 남는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과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를 읽으며, 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현대에 와서도 조선시대는 늘 많은 역사학자들과 일반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다. 두 책을 접한 이후에 인터넷 상에서 이미 노론에 대해 의견이
극도로 갈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오향녕과 이덕일이 있음은 우연이
아니었고, 호기심은 조금 더 크기를 키웠다. 기준의 문제라 할지라도 더 많은 이들이
광해군, 정조, 노론과 남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싸움을 벌일수록 현대 정치 또한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다음 도전은 두 작품을 필두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역사서로
채워가야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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